개성화
개성화에 대한 융의 설명은 개인의 성장이나, 참으로 개인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사람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한 것이다, 융이 말하는 '개성화'는 자기실현, 또는 충만하고 균형 있는 인격발달을 의미한다. 개성화는 무의식이 꿈을 통하여 당신에게 '말'할 때,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의 무의식을 탐구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은 자체를 민담과 신화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신화들이 개성화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신화들은 우리에게 보다 충만한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길잡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성화 과정의 네 단계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 다양한 단계들을 나타내는 신화적인 심상들을 언급할 것이다. 물론, 내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꿈에는 신화적인 심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사실, 예를 들면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신화는 꿈으로부터 나왔다는 증거도 있다. 그들은 신화가 특별한 사람들, 즉 부족의 거룩한 남자나 여자가 꾸는 특별한 꿈들에서 왔다고 믿었다)
제1단계 : 그림자
당신이 자신의 '그림자'를 만날 때, 자기실현을 향한 제1단계가 이루어진다. 그림자는 정신의 '어두운 측면, 즉 당신이 의식의 빛 속으로 가져오지 않았던 자신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당신 성격의 '원시적인' (미발달 상태나 초기발달 상태에 있는) 측면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당신이 자신의 안녕에 긍정적인 기여를 해 왔다고 간주하는 것들과 반대된다는 점에서, 당신 성격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꿈에서 그림자는 당신 자신과 동성의 인물(형이나 언니, 가장 친한 친구, 또는 이질적이거나 원시적인 사람)이거나 당신과 반대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문학에는 이에 대한 분명한 한 예가 있는데, 그것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이다. 이 작품 속에서 하이드는 지킬 박사의 무의식 속에 있는 그림자로 볼 수 있다. 이 그림자는 성격의 의식적인 부분과 분리되어 있으며, 의식적인 삶과는 다른 삶으로 이끈다. 내 인간의 주제는 동일한 방식으로 문학(즉, 헤르만 헤세 이야기의 steppen-wolf와 같이)과 민간전승의 특징을 형성한다. 문자사용 이전 사회에서는 개인 성격이 지닌 이 '다른' 측면은 때때로 '숲의 영혼'으로 묘사되었는데, 이것은 자체의 독립된 몸(대개는 근처에 있는 숲지대나 삼림지대의 동물이나 나무)을 갖는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러한 문자사용 이전 사회에서는 인간의 부락을 둘러싸고 있는 숲, 산림, 기타의 야생 지나 불모지대는 도덕률 폐기론의 상징, 즉 인간사회의 기존의 법과 질서에 대한 위협이 되었던 모든 것들의 강력한 상징이었다. 여기에는 무의식이 지닌 어두운 힘들이 의식적인 자아의 질서 정연한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신데렐라는 하나의 그림자를 나타낸다. 그녀는 언니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언니들은 밖으로 나가 세상으로 들어가지만, 신데렐라는 잠긴 방 안에 갇혀 있다. 이것은 외부세계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의식적인 자아와 무의식의 부분들, 즉 자신의 의식적 활동에서 지금까지 허락되지 않았던 부분들 사이의 대조를 나타낸다. 그러나 신데렐라는 결국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여 왕자와 결혼한다. 이 결혼은 의식적인 자아(왕자)와 그림자(신데렐라)의 결합을 상징한다. 이것은 무의식이 의식세계를 뚫고 들어간 것이고, 또는 의식이 무의식을 뚫고 들어간 결과이다. 상징적으로 (신화들에서 그리고 꿈들에서) 의식은 보통 남성으로 나타나고 무의식은 여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교는 의식이 무의식의 심층과 같은 어두운 동굴 속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한 흔한 상징이다(여기에 프로이트와 융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가 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거의 모든 심상들은 성에 대한 상징들이다. 이에 반하여 융에게 있어서 성행위 자체는 그 자체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상징일 수 있다).
그림자와의 만남에 대한 다른 상징들에는 회심의 주제가 들어 있다. 신약성서에서 '회개'로 번역되는 희랍어는 문자적으로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은 개성화의 제1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은 정반대의 방향(외부 대신 내부)을 보기 시작하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당신은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표명하게 된다. 새로운 능력이 당신을 위해 작용하고, 당신은 '삶의 신기함'을 경험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융은 이것을 개성화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세례 의식과 많은 홍수 신화들은 개성화의 제 1단계에 대한 상징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물은 무의식에 대한 상징이다. 세례에서 물속에 잠겼던 사람이 그 물속에서 올라올 때, 그는 '다시 태어난다'라고 한다. 이것은 의식이 무의식 속으로 내려가는 것과 그 결과로써 생겨나는 새롭고 더욱 충만한 삶을 상징한다. 또한 물이 지표면에 있는 것들을 완전히 파괴하고 물러감으로써 한 사람, 즉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노아, 힌두교 전통에서는 마르칸데야(Markandeya)만 남게 되는 대홍수 이야기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개성화에 대한 한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홍수(무의식)에 의해서 파괴되는 것은 페르소나이다. 페르소나는 우리가 성인 생활을 시작하는 데 쓰이는 일시적인 자기 얼굴이다. 이 부분적인 자기는 (노아나 마르칸데야에 의해서 나타나는) 온전한 자기가 나타날 때, 스스로를 해체하여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어떤 문화들에는 바다 밑으로 들어가 보물을 건져나는 잠수부의 신화들이 있다. 물은 다시금 무의식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물은 새로운 자기로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자기는 전에 묻어 두었던 자원들이 의식적인 삶에서 적절히 표현되는 때에 발견되는 것이다.
개구리 왕자의 이야기는 개구리가 3일 동안 밤마다 방문한 처녀에 대하여 말한다. 그녀는 첫 번째 밤과 두 번째 밤에는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세 번째 밤에는 그 개구리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개구리를 자기의 침대 속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녀가 개구리에게 입 맞추는 순간 그 개구리는 잘생긴 왕자로 변했다. 프로이트의 추종자이자 그의 전기 작가인 어네스트 존스(Ernest Jones)에게 있어서, 그 이야기는 성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한 처녀에 대한 우의적인 설명이다. 융의 추종자인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에게 있어서, 개구리는 단지 신화에서 보물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용들과 다른 무서운 괴물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용들이나 무서운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개구리는 어둡고 무서운 그림자를 나타낸다. 보물은 진정한 자기이다. 키스는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림자를 자신의 진정한 자기 됨의 운반자로서 받아들이고, 따라서 자신의 진정한 성격을 표명하게 되는 것이다.
개성화의 제2단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당신은 두 가지의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첫째로, 당신은 자신의 그림자를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당신의 그림자는 당신의 어두운 측면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무서운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당신은 그것을 악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것이 다른 어떤 사람의 소유물이라고 믿는 것이다. 집단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종족 차별주의와 '이교도들' (이 문맥에서 이교도들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함)에 대한 박해로 이끄는 것이다. '그들과 우리' 증후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어두운 측면을 다른 어떤 집단에 전가한다. 그리하여 그 다른 집단은 우리의 삶에서, 혹은 우리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그릇된 모든 것에 대한 비난을 질어지는 희생양이 된다. 융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원수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즉 내 자신이 사랑받아야 할 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대답은 당신의 어두운 측면을 통합시키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운 측면을 수용하고, 당신의 의식세계의 통제하에서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 어두운 측면은 어둡고 무서우며 적대적이기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대신에 그것은 당신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인격발달을 촉진시키며, 행복을 증진시켜 줄 것이다.
저항해야 할 두 번째 유혹은 그림자를 억압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림자를 무의식이라는 지하실에다 처넣고 문을 단단히 잠가 두는 것이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단순히 그림자를 억압하는 것은 머리가 아프다고 목을 자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치료 방법이다' 당신의 그림자가 당신에게 어떤 고통이나 불안을 일으키든 간에,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당신의 전체적인 자기 가운데 일부이며, 당신이 완전한 인격성장에 이르고자 하는 경우에 이용해야 하는 부분들이다. 그림자를 억압한다는 것은 단순히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조만간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이 어두운 측면에 굴복당하게 될 것이다. 대개, 그림자와의 첫 번째 만남은 단지 그것에 대한 부분적인 수용, 즉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에 이르게 할 뿐이다. 확실히 자신의 성격의 덜 바람직한 '어두운' 측면(처럼 보이는 것)들을 고백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 없이는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측면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개성화 과정의 다음 단계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제2단계 : 아니마와 아니무스
개성화 과정의 제2단계는 융이 말하는 '영혼 심상'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혼 심상은 원형심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남성에게 있어서는 '아니마'이고, 여성에게 있어서는 '아니무스'이다. 아니마는 남성 정신의 여성적인 측면들로서, 예를 들면, 친절, 부드러움, 인내, 수용성, 자연에 대한 친밀감, 용서할 준비 등이다.
아니무스는 여성 정신의 남성적 측면으로서, 독단성, 통제하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지, 투쟁성 등이다. 모든 남성의 정신에는 여성적인 요소가 들어 있고, 모든 여성의 정신에는 남성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불행하게도,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특히 서양 세계에서는 남자들이 자기의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이 하나의 미덕(관례에 맞는 일)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여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보여주는 것은 부적합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사회적으로 조건화되어 왔다. 이로 말미암은 하나의 결과는 남성이 여성들을 잘못 취급해 온 것이다. 남성이 자신의 여성성을 두려워하고 무시함으로써 비참한 결과들이 초래되어 왔다. 남성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을 억압해 왔을 뿐 아니라, 여성성이 탁월한 여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억압해 왔다. 즉 그들을 계속해서 복종적이며 무력한 상태에 있게 한 것이다. 남성 지배적인 세계에서 여성성에 대한 이러한 억압이 가져다준 결과는 전쟁이다. 전쟁은 남성의 공격성이 사랑과 인내, 그리고 조화를 위한 감정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발달한 결과이다.
즉 지금까지 남성들의 아니마는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다운 남성은 난폭하고 파괴적이다. 또 하나의 결과는 무감정한, 즉 영혼이 없는 성교이다. 성교는 개인이 온전성과 조화에 이르는 데 매우 귀중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탄트릭(Tantric) 신비 명상 전통에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성교는 존경이 있는 곳에서만, 즉 각각의 파트너가 성적으로 자신과 반대되는 성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는 곳에서만 그러한 절정에 이를 수 있다. 사나이다운 남성은 성교를 순전히 신체적이고 감정적 차원으로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그의 파트너는 단순한 성적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인 진보와 사회적인 진보를 위해서 자신의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즉 영혼 심상을 인정하고 통합시키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절박성에 부딪히게 된다.
이 영혼 심상은 당신의 의식적인 자아를 안전하게 무의식 속으로 인도해 주고 다시 안전하게 인도해 나올 것이다. 테세우스(Theseus)가 괴물 미노토르를 죽이기 위하여 크레테에 있는 미로를 통과해야 했을 때, 아름다운 아리아드니는 테세우스에게 자신의 실을 주어, 그가 미로 속에서 자신의 탈출로를 찾을 수 있게 했다. 만약 우리가 이 이야기를 융의 견해를 따라서 심리학적인 용어로 번역한다면, 미로는 무의식의 상징이고, 괴물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지금까지 무시되었고, 그러므로 ‘미쳐 날뛰게' 된 모든 것의 무섭고 위협적인 측면이다.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야만적이고 제멋대로인 힘을 길들이고, 그것을 의식의 통제하에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살해'는 사랑에 의해서만, 즉 무시된 것을 수용하고, 존중하며, 그것을 우리의 의식 속으로 기쁘게 영접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영혼 심상은 의식적인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만들어 내고, 그 둘을 화해시키는 중재자이다. 종교의 영역에는 영혼의 사자가 있는데, 그는 인간의 영혼들을 안전하게 지하계로 안내한다: 또는 어떤 문화에서는 무당이 있는데, 그는 죽은 사람의 영혼들을 영계로 인도하고, 그 신입자들을 적절히 돌보며, 재생을 도울 영들에게 그들을 안내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치유를 위하여 병든 사람들의 영혼들을 영계로 데려간다, 영혼의 사자와 무당은 아니무스나 아니마의 형상들이다. 지하계나 영계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의식적인 자아는 무의식 속으로 내려감으로써 새로운 삶에 도달할 수 있다.
영혼 심상은 당신의 페르소나(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그리고 그 세계에서 명성을 얻기 위하여 당신이 구축해 온 사회적 얼굴)에 사로잡힌 자들과 정반대 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의 페르소나가 지적인 것이라면, 당신의 영혼 심상은 감정과 정서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직관 유형에 속한다면, 당신의 영혼 심상은 육감적이고 감각적일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자신의 영혼 심상을 인정하고 그것과 친숙하게 되는 것 대신 당신이 그것을 이성에게 투사한다면, 당신의 관계는 비참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서적인 남자는 자신의 파트너에게 청색 스타킹을 선물할 수 있다. 또는 예민한 여성은 수염을 기른 지적인 사람들에게 완전히 매혹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자신의 영혼 심상을 수용하고 통합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페르소나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채워 주고, 당신이 더욱 충만하고 균형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꿈에 나타날 수 있는 영혼 심상의 몇 가지 형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융은 '영혼 심상을 제일 먼저 전해 주는 사람은 언제나 어머니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적용되는데, 그것은 그러한 남자나 여자는 어머니로부터 아직 독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는 것(특별히 그녀가 소유욕이 강하거나 탐식적인 특징을 가진 채로 드러난다면)은 당신의 영혼 심상의 상징이다. 만약 그렇다면, 명심할 것이 있다. 당신을 질식하게 하는 어머니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당신의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의식적인 자아 속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 심상을 수용하고, 존중하며, 인격성장을 위한 창조적인 기여자로서 환영하라. 그러면 당신은 자신의 영혼 심상이 꿈에서 당신을 삼키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어머니로부터 적절하게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가라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비록 돌아가신 어머니가 당신의 무의식 속에서 강력한 존재로 남아 있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어머니 상 이외의 영혼 심상을 나타내는 꿈의 상징들은 언제나 꿈꾸는 사람과 반대의 성(性)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남자의 아니마는 꿈에서 자신의 여자 형제로 나타날 수 있고, 여자의 아니무스는 자신의 남자 형제로 나타날 수 있다. 아니무스의 다른 상징들로는 독수리, 황소, 사자, 그리고 (발기된) 남근상 혹은 탑이나 창과 같은 남근 모양을 한 기타의 것들이 있다. 독수리는 높은 곳과 관련이 있고, 신화에서 하늘은 보통 (고대 이집트 신화를 제외하고) 남성으로 간주되고 순수한 이성이나 영성을 상징한다. 대지는 여성으로 보이고, 직관이 가미된 감각적인 생활, 즉 감각의 한계 안에 한정된 생활을 상징한다.
암소, 고양이, 호랑이, 동굴, 그리고 배 등은 아니마 상징에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다소 분명하게 여성적인 형상들이다. 배는 바다와 연관이 있다. 그런데 그 바다는 흔히 여성성을 상징하고, 팅 비어 있는 배는 자궁 같은 것을 상징한다(배를 진수시킬 때, 아직도 우리는 '그 녀를 항해하는 모든 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동굴은 팅 비어 있고 자궁 같다. 때때로 동굴은 물로 채워지는데, 이것은 여성성에 대한 또 하나의 상징이다. 그 동굴은 땅에서 움푹 꺼진 곳으로써, 그것은 (우리가 보는 것처럼) 여성의 성(性)에 대한 상징이요, 대지의 자궁이거나 자궁으로 들어가는 질의 입구이다.
아니마에 대한 보편적인 표현에 관해서 언급한다면, 이것은 곤경에 처한 처녀의 형상으로, 소위 '영웅' 신화라고 부르는 것들에서 빈번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마음에 다시 떠오르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아름다운 처녀를 구출하고, 몇몇 경우에는 그녀와 결혼하는 영웅에 대한 주제이다(즉, 그리스의 영웅 페르세우스는 에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를 바다 괴물로부터 구출하고, 나중에는 그녀와 결혼한다).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말하는 민간설화에서, 영웅은 키스로써 죽음의 잠을 자는 처녀를 깨운다(잠자는 공주). 곤경에 처한 처녀는 남자의 아니마이다. 그것은 무시당하거나 억압을 당해 왔기 때문에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죽은" 것이거나 '곧 죽게 될' 위험 속에 있다. 생명을 구출하거나 그녀에게 입 맞추는 것은 자신의 여성성을 어두운 감방으로부터 건져 올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행복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기꺼이 맞이하는 것을, 그리고 참으로 그것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왕자가 잠자는 공주를 깨우는 데 성공하면, 수백 년 동안 잠을 자고 있던 궁궐에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이것은 남자의 아니마를 '깨우는’ 것이 그의 정신의 '잠자는' (억압되고, 무시된) 모든 측면들을 깨우기 위한 첫 단계라는 사실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아니마 형상은 매력적인 처녀이다. 온디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온디네는 영혼이 없다. 그녀는 한 남자가 포옹해 줄 경우에만, 영혼을 얻을 수 있다. 항해자들을 물속에 있는 자기 침대로 유혹하는 인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메시지를 얻게 된다. 남자여, 그대의 아니마에 생기를 주라; 그렇지만 그대의 무의식 심층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거기에 있는 보물을 찾아라. 그런 다음엔 그것을 다시 표면화시키라. 다른 말로 하면, 의식의 통제를 유지하라. 민간설화의 아니무스 형상은 난쟁이이다. 난쟁이와 기타의 '작은 사람들'은 광산의 지하에서 일한다. 그들은 광산으로부터 금과 기타의 귀중한 물질들을 캐낸다. 이것은 (백설공주가 일곱 난쟁이들을 돌보았던 것처럼) 한 여인이 아니무스를 보살피고 양육하는 경우에, 그 아니무스가 어떻게 그녀의 무의식으로부터 귀중한 것들을 많이 가져다줄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 귀중한 것들은 그녀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그리고 자기실현을 추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결혼이나 성교(또는, 비교적 현대적이고 불온한 부분이 삭제된 민간전승에서는 입맞춤이나 포옹)는 의식적인 자아와 무의식적인 영혼 심상의 합일과 혼합을 상징한다. 그것은 또한 개성화의 마지막 단계인 의식과 무의식의 완전한 합일을 상징한다. (세 번째 가능성은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그림자와 구별되지 않는 곳, 즉 구출되지' 않은 곳에서, 영혼 심상과 그림자는 신부와 신랑에 의해서 상징될 수 있다)
제3단계 : 마성인격(魔性人格; Mana Personality)
제3단계는 남자가 지혜 노인을 만나고 여자가 대모(大母)를 만나는 단계이다. 이러한 원형 심상들은 능력과 지혜의 상징들이다. 융은 그러한 원형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마성인격'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원시 사회에서는 누구나 비범한 능력이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마성(mana: 멜라네시아 말로 '거룩함'이나 '신성'을 의미함)으로 충만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융은 우리에게 이러한 마성에 사로잡히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것은 흔히 과대망상증으로 끝난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의식세계가 대모에 의해서 침입되고 정복되는 것을 허용하는 여인은 자신이 온 세상을 보호하고 양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운명이 라고 믿기 시작할 것이다. 유사하게, 지혜 노인이 자신을 대신하는 것을 허용하는 남자는 자기가, 영웅적인 능력이나 사물의 의미를 간파하는 우월한 통찰력으로 충만한, 어떤 종류의 초인이거나 위대한 교사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성인격은 정신의 깊은 부분들에 자리하고 있는 능력과 지혜의 상징이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것은 투사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능력과 지혜가 들어 있는 내부의 창고와 접촉하는 대신에, 그것을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그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 즉 국가의 지도자나 현대신화에 나오는 초인적인 인물의 소유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마성인격을 올바르게 다루는 방법은 그것을 투사하거나 계속해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신의 의식 속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삶을 지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다만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로 풍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의식과 무의식을 더 이상 대극들로 보지 않고, 정신의 협력적이고 보완적인 두 부분들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이 제3단계에서 어머니로부터 두 번째로 해방된다고 말한다(어머니로부터의 첫 번째 해방은 제2단계로서,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의식적인 삶에 통합되는 때를 말한다). 이 두 번째, 그리고 보다 완전한 해방은 자신의 진정한 개체성에 대한 순수인식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 노인의 공통적인 상징들로는 왕, 마법사, 예언자, 도사, 그리고 안내자가 있다. 대모의 공통된 상징들로는 여신이 나 다산성(즉, 큰 유방, 많은 유방들, 넓은 궁둥이, 또는 탁월한 질을 가진 나체의 여성상)과 관련된 여성의 형상, 여사제, 그리고 여예언자가 있다. 여기에서 '예언자'와 '여예언자'란 말은 신이 나 여신이 누군가를 통하여 말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4단계 : 자기(自己)
제4단계는 개성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이다. 융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융은 때때로 이것을 '자기실현'의 단계라고 부른다. 때때로 그는 이 용어를 개성화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그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마지막 단계를 '완전한 자기실현'의 단계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완전한 자기실현이란 말은, 그것이 마지막 단계라 할지라도 하나의 단계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 그리고 이 단계 안에 여전히 성장과 발달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제4단계는 융이 '자기'라고 부르는 것을 만나는 데 자리한다. 이 자기는 자아와 구별되어야 한다. 자아는 의식세계이다. 자기는 전체적이고 완전히 통합된 정신이다. 이 통합된 정신에서는 상반적이고 갈등적인 요소들이 결합되고 조정된다. 융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명심하라. 무의식에는 성격의 의식적인 차원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들과는 상반된 특징들과 역량들이 들어 있다(즉, 만약 당신이 외향적인 유형에 속한다면, 당신의 무의식은 내향적일 것이다). 개성화의 이 마지막 단계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완전히 통합되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형성한다. 이 조화로운 전체는 이전에는 상반적이었고, 그러므로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상충적이었던 것들이 변화되어 형성되었다.
(완전한) 자기실현의 경우에, 사람의 의식은 더 이상 사고(사태를 머리로 풀어내는 추리)와 공상(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완전한 자기실현에는 전에는 무의식만의 소유였던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이 들어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전체적인 정신은 이제 의식적이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표현하는 다른 하나의 방법은 당신의 몸을 충분히 의식하고, 당신의 몸은 충분히 의식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의 인생관, 즉 가치들과 목적들에 철저한 변화가 온다. 당신은 자신의 몸을 아주 편안하게 느낄 것이며, 기쁨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이제 더 큰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며, 더 이상 이기적이지 않다. 특별히 당신은 순전한 의식에서, 그리고 올바른 존재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어, 성취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
융은 이러한 자기실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넓혀진 의식은 더 이상 무의식의 반대 경향들에 의해서 보상되고 교정되는 개인의 욕망, 두려움, 희망, 그리고 야심으로 어우러진, 이기적인 덩어리가 아니다. … 대신에, 그것은 대상세계와 가지는 하나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 대상세계는 개인을 거대한 세계와의 절대적이고 결속적이며 분리될 수 없는 친교 속으로 데려간다.
융이 설명하는 것처럼, 이 개성화의 마지막 단계는 신비가들이 오랜 명상을 통하여 도달한 의식상태와 유사하다. (명상이 자신의 전체적인 정신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융의 ‘자기’는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 실재이다, 그것이 비록 당신 성격의 궁극적 실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것이다. 그것은 만물과 만인의 궁극적 실재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이거나 동양의 신비 명상 전통에서의 범신이다. 이 범신은 실재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실재의 현시들이거나 (부분적인) 화신들이다.
그러나 자기실현이 어떤 더 큰 실재에 빠져 버리거나 그것에 의해 삼켜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여기의 더 큰 실재는 인도 사상에서 한 방울의 물이 대양과 합쳐지는 이미지에 의해 암시될 수 있다). 또한 자기실현은 무의식에 압도당하는 것(정신병의 상태, '사로잡힘'의 상태)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당신이 지금 충분히 의식적인 상태에 있으며, 다만 당신 '자신의' 의식이 만물 어디에나 존재하는 의식(때때로 신비 명상 전통에서 우주 의식'으로 언급되는 것) 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는 정신에 대한 당신의 경험에 있어서 궁극적인 것이다. 자기를 경험한다는 것은 당신 자신, 당신의 삶, 숙명, 의미, 그리고 삶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에 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자기실현의 이 마지막 단계에서 정반대의 것들이 어떻게 결합되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어떻게 변형되는가에 대하여 말했다. 이 사실에서 특별히 흥미 있는 한 가지 측면은, 우리가 선하다고 하는 것과 악하다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한 쌍의 대극들과 관계된다. 무의식의 내용이 처음에는 악한 것(어둡고 위협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무의식의 동일한 부분들은 우리의 성격을 풍요롭게 하고 확장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이 목적하는 바가 아닌가! 무의식은 개인으로 하여금 충만한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보유하고 있다. 무의식의 내용이 선한 것이 될 것인지 아니면 악한 것이 될 것인지는 그것들이 통합되고, 진지하게 고려되고, 존중되고, 그리고 의식생활에서 적절한 표현이 허용되는가에 달려 있다.
개성화의 제4단계는 의식과 무의식의 완전한 통합과 상호 침투가 일어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는 전에는 악했던(악하게 보였던) 모든 것이 이제는 선하게 되는 단계, 또는 선한 것으로 인정되는 단계이다. 만약 비유적이고 극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면, '자기실현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마귀가 하나님이 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신에, 전에는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이제 마귀는 줄곧 하나님이었던 분으로 보일 것이다. 동일한 사실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마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정신에는 더 이상 악한 것이 존재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그 악을 어떤 외부적인 존재에 투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성화 과정의 이 제4단계의 상징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상징들 대부분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한 상징들은 자기실현의 마지막 단계나 제1단계로부터 제4단계에 이르는 개성화 전 과정의 상징들이거나, 네 단계들 가운데 한 단계의 상징일 수 있다. 이것은 처음에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당황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에 대한 부분적인 탐구는 이미 하나의 (부분적인) 자기실현이고,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음 자신은 개성화의 마지막 단계에 대해서 뿐 아니라 네 단계 전 과정에 대하여 '자기실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융은 개성화 과정을 균형 있게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너무도 경직되고 교리적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4'라는 수(와 그것의 배수)는 완전함, 즉 온전성을 의미하는 상징수이다. 융은 그것 때문에 개성화 과정을 4개의 단계로 나누는 것일까? 그는 확실히 네 가지로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인간 정신이 담당하는 가장 중 요한 기능을 다음 네 가지로 보았다. 사고, 직관, 감정, 감각. 그는 방해받지 않은 모든 꿈은 장면 설정, 문제 진술, 절정을 향한 이동, 문제 해결의 네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네 개의 단계들에 대한 융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1단계와 제2단계는 서로 겹칠 것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자각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 심상에 대한 느낌을 수반할 수 있다. 유사하게, 어떤 사람들은 제3단계와 제4단계가 어느 정도 서로 겹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있는 심원한 지혜 및 능력과의 만남은, 그들 정신의 궁극적인 기초는 하나님이라는 자각인 동시에, 그들의 정신은 우주적인 차원 (단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을 가진다는 자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제4단계는 제1단계의 완성일뿐이다. 개성화의 전 과정은 자신의 그림자에 대한 연속적인 탐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자는 융이 제4단계라고 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완전히 통합되지) 않는다. 제4단계의 상징들은 흔히 신화와 종교의식으로부터 기원한다. 어떤 상징들은 개인의 영혼과 하나님의 궁극적인 합일을 표현한다. 예를 들면, 어린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당신의 영혼이나 정신에서의 신성의 '태동, 당신의 자기의 심층에 자리하는(왕좌에 앉아 있는) 거룩함, 신혼부부나 성행위를 하는 부부, 또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신체적 특징들을 가진 한 형상. 그러나 마지막의 두 상징들은 영혼 심상의 통합(정신의 남성적인 측면과 여성적 측면의 '결합')이나 정신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의 일반적인 상호 침투를 나타낼 이러한 심상들이 꿈에 나타날 때, 그 심상들이 개성화의 어느 단계를 상징하는지는 당신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실현을 향한 진보가 어느 상태에 있는가 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상징이 말하는 것은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지금 어디를 가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상징 (홍수, 또는 물에 잠김, 고래가 삼켰다가 나중에 토해 냄, 태양이 바닷속에 잠기고 새벽에 다시 떠오름, 또는 시체를 일어나게 하는 생명의 키스 등)은 의식적 자아가 무의식 속으로 내려갔다가 새롭고 변형된 존재로 다시 떠올라 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꿈에 드러난 그러한 상징이, 당신이 자기실현 과정의 끝 가까이에 있는 것을 말해 주는지, 아니면 자기실현 과정을 이제 막 시작했거나 또는 시작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지는 당신이 판단해야 할 일이다.
자기실현은 못생긴 오리 새끼가 아름다운 백조로 변형되고, 개구리가 멋있는 왕자로 바뀌는 것과 같은 변형 과정들에 의해서 상징될 수 있다. 만다라(Mandala, 신상이나 신의 속성이 그려져 있는 기하학적 도형)는 자기를 나타낸다. 만다라는 정사각형이나 원으로서 대개 분명한 중심점이 있고, 때때로 여러 조각들로 나누어지는데, 명상에 사용되는 힌두교와 불교의 만다라들(만다라들이 얀트라로 알려진 명상과 관련하여)처럼 고차원의 양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쉬리 얀트라('최고의 얀트라'를 의미함)에는 성전 설계도가 들어 있다. 그 설계도에는 4개의 벽과 4개의 현관 외에도, 꼭짓점이 위를 향하는 삼각형과 아래로 향하는 삼각형이 있다. 이 삼각형들은 각각 정신의 요소들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또는 의식과 무의식)을 나타내거나 모든 실재에 결합 또는 혼합되어 있다고 믿어지는 정반대의 것들을 나타낸다. 어떤 교회나 사찰 혹은 어떤 방은, 그것이 정사각형이나 원으로 되어 있는 한, 만다라의 형상일 수 있다. 특별히, 정원도 정사각형이나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중심점(예를 들면, 샘 또는 새를 위한 물 쟁반이나 수영장 같은 것)이 있다면, 만다라의 형상일 수 있다. 4라는 수 자체가 일종의 만다라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사각형의 4면을 나타내거나, 나침반에서 주요한 지리적 4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나침반은 전체적인 실재, 온전성, 완전을 나타낸다. 어떤 만다라에서든 대칭적 균형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자기실현에 도달한 사람의 질서와 조화를 상징한다.
융의 통찰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하여
자기실현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어서 당신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부디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꿈은 당신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실현의 상징들은 당신에게 미래에만 완전히 도달될 수 있는 목표를 가리키고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상징들은 지금 당신의 상황에 대하여 무의식이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들은 당신이 해야 할(하기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만다라 꿈의 메시지에 있어서 거리가 먼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일한 것이 과거로부터 유래된 꿈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러한 꿈들의 주안점과 목적은 당신의 현재 문제를 풀어 줄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미국의 꿈 해석가인 에드거 케이스는 심지어 어떤 꿈들은 전생에서 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주장하기를, 그러한 꿈들의 메시지는 항상 그 꿈을 꾸는 사람의 현재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대체로 말하면, 혹자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첫째로는, '자수성가' 유형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불타는 단 하나의 야심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향해 있다. 둘째로는,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꿈 해석은 첫째 유형의 사람보다는 둘째 유형의 사람에게 더욱 호감을 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의 꿈에 유의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자기 인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꿈 해석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기꺼이 들여다볼 경우에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범주에 든 사람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에 의하여 생각하고 기능하는 사람들은 두 개의 하위 범주로 나누어진다. 1) 자수성가한 사람들. 이들은 성공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2) '실패'한 사람들. 이들은 세상적인 눈으로 보거나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성공적으로 살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위 범주 내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은 보통 분노와 격렬한 불만으로 채워지거나, 계속해서 일종의 희망(아마 내주에는 도박에서 따겠지, 아니면 무엇인가 좋은 일이 갑자기 생기겠지 )을 걸고 있을 것이다. 하위 범주 애에 속한 사람들, '자수성가'한 남자들과 여자들은 마침내 물질의 소유, 경제적 안정, 또는 부(富)에 대한 자랑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심원한 갈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에게 당분간 즐거움과 행복을 주지만, 소유와 관계없고 주식 시세나 은행 잔고에 영향을 받지 않는 내적인 행복과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두 번째 범주에 든 사람들은 성공하기보다는 자신을 발견하는 데 더욱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융이 개성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을 시작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개성화 과정은 자기 자신 속으로의 여행을 말하는데, 이 여행은 그들을 풍성한 지혜와 기쁨으로 인도하고, 마침내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들 자신의 핵심, 즉 생명이나 자연, 또는 초월자와의 합일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여행이다.
(당신이 이 궁극적인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느냐(그것에 대한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름이 이런 것보다는 차라리 저런 것이 낮다고 고집하는 것은 순전한 교조주의이다. 이것은 종종 제도화된 많은 종교들에게 해독을 끼쳤던 교리주의와 동일한 것이다. 흥미롭게 도, 융은 제도화된 모든 형태의 종교를 거부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러한 종교들은 신화의 상징적인 시를 지적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경화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지적 교리가 종교의 출발점이자 존재 이유였던 실재에 대한 실제 경험을 대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말로 하면, 융은 종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참 종교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감추어 버렸기 때문에 종교들을 반대했다. 그 경험된 실재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실재를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은 형식이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그 실재는 어떤 오감에 의해서도 감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실재는 감각 인식과 관련된 뇌의 어떤 간섭도 없이, 단지 느껴지고, 직접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험에서는 아는 자와 알려진 것 사이의 구별은 사라진다; 당신이 그 실재이고, 그 실재가 곧 당신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하나의 신비경험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두 번째 범주에 든 사람들은 꿈 해석에 대한 융의 접근방법에 더욱 매료될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범주에 든 사람들도 마침내 자신의 내적 세계를 철저하게 탐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융의 접근방법은 실재의 가장 심원한 곳 (또는 그 중심)을 살펴보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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